중세는 과연 양식 부재의 시대일까?

w. Cedar 🪵

중세를 대표하는 **‘비잔티움 미술’**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중세 교회의 원형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한데요. 교회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신자들을 수용할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것이 곧 고전 집회소 ‘바실리카’를 본뜬 비잔티움의 교회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죠. 반원 모양의 ‘감실’과 신자들이 모이는 중앙의 커다란 ‘신랑’, 이보다 좁고 낮은 측면 복도인 ‘측랑’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중세 교회의 일반적 형태가 해당 시기에 갖춰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바실리카’를 장식하는 것이 중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신중함을 요하는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교회를 어떠한 형식의 미술로 채울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였다고 해요. 그리스 미술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형식 중 하나인 **‘조각’**은 이교도와의 구분을 위해 공통적으로 사용을 반대하는 시류가 형성되었으나, **‘회화’**의 경우는 조금 달리 고려되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글을 읽지 못하는 신도들을 위한 훌륭한 설명도가 되어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죠.

다만, 당시 성상에 허용된 미술 형식은 매우 제한적이었어요.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회화는 장식이나 화려함은 최대한으로 배제하고 명확하고 단순하면서도 성스러움을 담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 미술의 관념이 문득 떠오르는 것 같지 않나요? 이에 대한 예시로 당시 이탈리아 라벤나의 대가가 그린 성상화를 들 수 있는데요. 깊은 색채감을 품은 돌이나 유리 입방체를 짜맞춘 ‘모자이크’ 양식으로 제작된 형상은,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 혹은 운동감과 표정을 강조했던 로마 시대의 작품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라벤나 (사진 출처 : E. H. 곰브리치 저서 『서양미술사』)

<빵과 물고기의 기적> 520년경.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라벤나 (사진 출처 : E. H. 곰브리치 저서 『서양미술사』)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은 비잔틴 미술이 그리스 미술을 완전히 등한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기법과 세련된 기법이 묘하게 섞인 결과물이라 볼 수 있는데요. 그리스와 로마의 다채로운 인체 표현 방식을 모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성스러운 것을 그린다는 작품의 제작 의도를 드러내는 독특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음이 그 특징입니다.🧐

기독교 미술에 있어 그 정당한 목적은 시대가 흐르고 기득한 세력이 변화하며 조금씩 그 해석을 달리했습니다. 동로마 제국 내에서도 성상 자체를 반대하는 성상파괴주의적 입장과 성상이 설명의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도 숭상될 수 있다는 입장이 차례로 모두 등장했는데, 이에 종래에는 미술가들의 상상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더 이상 허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림이 설명도 그 이상의 역할을 해냈어야 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때, 아름다움이 아닌 오래된 전통에 의해 신성시된 회화의 전형이 탄생하게 됩니다.